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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시에

1720

그르시에

그르시에

18세기 초, 왕은 보르도의 대자본가들에게 장교가 될 수 있고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과감한 성격의 그르시에는 1720년이 시작되자마자 포이약에 면한 도로에, 충적토 평야를 굽어보고 있는 자갈 산등성이를 선택하여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이 산등성이 정상에 위치한 마을은 그랑 푸조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습니다. 그는 이곳에 부속 건물을 여러 채 지었을 뿐만 아니라 20년 후에는 이곳에서 포도 재배를 하기 위하여 수도원 한 채를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유럽 북부 시장이 문을 연 다음부터 보르도의 경영자들은 품질이 좋은 와인을 생산하여 판매하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자 그는 곧바로 이를 실천에 옮깁니다. 그가 판매하는 와인은 평판을 높게 받았습니다.

샤스 스플린을 기다리다

1820

샤스 스플린을 기다리다

샤스 스플린을 기다리다

조상의 이름과 마을 이름을 합쳐 쓰면서 공동 재산으로 등재되어있던 영지는 1820년 둘로 나뉘었습니다. 아들은 푸조 그르시에의 소유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딸인 뤼크레스는 포도 재배 샤토의 카스탱 드 푸조라는 남자와 결혼을 하면서 포도원을 상속받지만 이름을 물려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에 그녀가 생산하는 와인을 출품하게 되자 이름이 하나 필요했습니다. 푸조 카스탱은 그저 수많은 푸조 가운데 하나의 푸조에 불과했습니다.

그녀의 의붓딸로 이미 과부였던 로자 페리에르가 마침 그 때 전설로 내려오던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뭐냐하면, 바이론 경이 유럽 남부지방의 도로를 누비며 혁명을 지원하다가 그르시에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집안 증조부에게 성대한 환대를 받으며 와인을 마시게 된 바이론 경은 우울증(spleen)을 쫓는(chasser)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는 말로 이 와인을 극찬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가 바로 이 와인 이름이 ‘저작권’을 갖게 된 배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좀 생뚱맞지요.

샤스 스플린의 탄생

1863

샤스 스플린의 탄생

샤스 스플린의 탄생

로자 페리에르는 강단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신교도였던 그녀는 물리정메독 마을에 이 교파의 학교를 세웠습니다. 남서부가 극단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절대적인 정교분리가 권장되던 시기에, 그녀가 한 이러한 행위는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학교는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마을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남편은 사망하면서 카스탱 그랑 푸조 도멘의 통솔권만을 그녀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이 영지는 이미 개간이 잘 되어 있던 곳으로, 명성은 더욱 더 높아지게 되는데 이는 런던 만국박람회 조직위원들이 이 영지에서 생산하는 와인의 빈티지 몇 개를 출품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사실 조직위원들은 영불해협을 건너서도 평판이 자자한 이 와인의 변하지않는 품질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와인은 거의 없으니까요…

로자는 마케팅 분야에서도 선구자였습니다. 초대의 대상이 된 그녀의 와인은 철수나 영희처럼 이웃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 와인의 이름에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농지들은 소유자의 이름과 장소 이름을 섞어쓰는 방식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랑 푸조 개간지들도 이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런던 만국박람회가 확인시켜 주었듯이 당시는 영어가 대세인 세상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영불동맹의 시대이며 에드워드 7세가 파리에서 여생을 보내는 세상이었습니다. 해수욕과 산행 등 멋스러운 것들은 영국에서 나왔습니다. 영어로 만들어진 단어들이 프랑스어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Spleen은 보들레르가 프랑스에서 ‘상표 등록’을 한 단어입니다.

오딜롱 르동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여전히 보르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껏해야 23세였었고 거장 상징주의 예술가들의 축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역에서는 이름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로자는 그가 십리 못되는 거리에 있는 부친의 농지인, 메독의 페이를르바드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그가 ‘악의 꽃’의 삽화를 그렸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친구들과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이었던 그녀의 살롱 한켠을 차지하고 있던 오딜롱의 시류 그림과 로자의 후각이 아마도 이 영지의 이름을 탄생시킨 근원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영감을 드러내는 그의 능력과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선택한 탁월한 이름, 샤스 스플린 말입니다.

단기간의 소유

1912

단기간의 소유

단기간의 소유

18세기가 되자 보르도 고급 와인 시장은 북유럽에서 조사 대상이 되었습니다. 독일 장식을 단 한자동맹 상인들이 이 시장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대외구매를 보장받기 위하여 자식들을 지롱드 강가로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영업적 측면에서 시작된 보르도 항구와의 관계와 생활방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더 친밀해져갔습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포도나무 재배를 하거나 농지를 사기도 했습니다. 제그니츠 가문은 브레멘에서 사업을 키웠습니다. 이들은 몇 세대에 걸쳐 보르도 와인 사업을 했습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이들이 보르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더욱 강해지고, 그것이 1912년 페리에르 부인에게 샤토 샤스 스플린을 구매하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하지만 부인의 상속자들은 이 매각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집안이 몰락하는 순서를 보면 처음엔 여자, 말 또는 메독의 샤토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 농담처럼 나돌았습니다.
이들의 지휘 하에 샤스 스플린은 독일 북부에서 명성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하지만 아뿔싸! 2년 후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샤스 스플린은 적국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국가에 압수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뼛속까지 장사꾼이었던 이들은 브랜드에 대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잇점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국에서 이 와인을 재유통시키기 위해 재빠르게 새 소유주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샤스 스플린은 시장에서 선두 주자로서의 위치를 다시 차지합니다. 제그니츠 가문은 처음에는 라아리 가문과, 다음에는 메를로 가문과 실질적인 유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제그니츠 가문의 일원인 헤르만은 20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이 포도재배 농지의 탁월한 특별 전문가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는 이 농지를 돌보는 것을 좋아했고 루터교 신자답게 점잖은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라아리 가문의 근대식 지휘

1920

라아리 가문의 근대식 지휘

라아리 가문의 근대식 지휘

프랑스 모리악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랑드 출신 부르주아지 가문들이 수천 헥타르의 프랑스 해송을 소유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신랄하게 묘사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보르도의 땅을 처분하지 않은 채 스페인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라아리 가문은 바로 이 부류에 속했습니다. 랑드 식 사고방식이 확고했던 이들은 자신의 성(姓)까지도 지역의 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재산의 상당 부분을 삼림 수입에 의존하던 프로스퍼 라아리는 농업 쪽에서 이를 다양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독일인 소유 재산에 속하기 때문에 전쟁 배상금으로 국가 소유가 되었으나 좋은 평판을 유지하고 있던 물리스 포도재배 농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샤스 스플린은 2회에 걸쳐 경매를 진행했음에도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계대전이 막 끝난 후라서 당시의 경제 상황은 암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모든 재산은 바닥이 드러났기 때문에 포도재배와 같은 불확실한 모험을 하는 것은 위험한 짓으로 여겨졌습니다. 프로스퍼는 결국 결단을 내리고 1922년 이 농지의 주인이 됩니다. 해송과 테레벤틴유 사업이 잘 되고 있었기 때문에 포도 재배를 위한 개간 사업에 재원이 필요할 경우 버팀목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샤스 스플린은 천운의 수혜자가 되어 불안한 수입으로 인한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샤스 스플린의 와인은 변치 않는 품질 덕분에 유럽 시장에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와인의 라벨 그림은 샤스 스플린의 발효탱크였는데 1964년 메독에서 최초로 지하에 저장된 와인이라는 의미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주르날 오피시엘에 등재되지는 못했지만 1919년에 실시한 등급심사에서 탁월한(exceptionnel) 와인으로 평가받기도 했던 경력이 있는 샤스 스플린은 1970년대 초까지 이견이 없이 크뤼 부르주아 와인 가운데 최고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샤스 스플린은 이로부터 약 90여년이 지난 후 개최된 2003년 임시 등급 심사에서 다시 한 번 이 등급을 차지하여 품질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프로스퍼가 포도원의 주인이 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인 프랑크가 포도원 경영을 맡습니다. 오직 투자 대상으로 생각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아들은 열정적으로 포도원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50여년간 그는 놀라울 만큼 열심히 포도원을 가꾸었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샤스 스플린은 1855년 등급 심사 때 받았던 순위를 지속적으로 바꿔놓게 됩니다. 고향인 랑드로 돌아가 만년을 보낼 생각이었던 그는 변화하고 있던 와인 사업에 대한 준비가 잘 되어있는 메를로 가문에게 1977년 샤토를 매각했습니다. 그는 10년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새로운 비전

1976

새로운 비전

새로운 비전

자크 메를로는 1911년 보르도에서 태어났습니다. 행정관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그는 처음에는 같은 길을 걸었지만 사업을 하는 것에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1931년 HEC를 졸업하고 매형과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매형의 이름을 따서 사명을 지은 이 회사는 샴페인 판매를 통해 남아메리카에서 거둔 성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세트, 다음에는 베르시에 주소를 두고 유럽 남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출발하는 와인 수송선과 열차들을 프랑스에 문제없이 도착시켜 고객에게 와인을 전달하는 일을 담당하는 와인도매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큰물에서 놀 줄 아는 사람은 남보다 빨리 큰물을 예측, 분석하고 이에 대처합니다. 1970년 그는 프랑스 영토 내의 여러 지점을 정기적으로 점유하는 기업들의 점증하는 각종 요구를 대처하기 위한 일류 교섭 상대자로 빠르게 인정받았습니다. 회사가 성장한다는 것은 그가 담당하는 유명한 고객들이 증가함을 의미했습니다.

와인 시장이 고급화되자 자크는 보르도의 명품 와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몇 개의 보르도 와인 거래회사를 인수하였는데 1970년에는 메스트르자(Mestrezat), 1978년에는 지네스테(Ginestet)와 데스카(Descas)가 그 대상으로, 훗날 아들인 드니가 이를 물려받게 됩니다. 그는 론강 계곡의 콩파니 로다니엔과 루아르 강 계곡의 조제프 베르디에, 부르고뉴의 로피토(훗날 다시 매각)를 매입하는 등 프랑스 내의 다른 지역으로 사업을 넓혀갔습니다. 그는 파리 교외에 위치한 샹토방과 갈라서면서 다량의 와인 거래 사업에서 손을 털고 나옵니다. 와인 생산에 관심을 가진 그는 1976년(당시 나이가 이미 65세) 물리스의 최고급 크뤼 부르주아인 샤토 샤스 스플린을, 1978년에는 마고의 크뤼 부르주아인 샤토 라기르그를, 1982년에는 5등급 크뤼 클라세 드 포이약인 오바즈 리베랄을 매입합니다. 고급 와인 시장의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는 홀로 최선봉에 서서 매입한 세 개의 농지를 경영했을 뿐만 아니라 1992년에는 마고의 3등급 크뤼인 샤토 페리에르를 매입하여 이 대열에 합류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1996년 오메독의 크뤼 부르주아 생산지인 샤토 시트랑을, 1997년 생 쥘리앙의 2등급 크뤼 생산지인 샤토 그뤼오 라로즈를 그의 품안에 넣음으로써 더욱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가 고령에 이르자 자식인 드니, 앙트완, 장, 그리고 손녀딸인 클레르와 셀린이 그룹을 이끌어갑니다. 그룹은 2000년 오카나간 강 계곡에 오소요즈 라로즈라는 캐나다 합작투자 포도원을 설립하여 성장에 더욱 더 탄력을 받게 됩니다. 이 포도원이 위치한 곳은 보르도와 비슷한 지형이었기 때문에 북아메리카에서 대성공을 거두게됩니다. 2003년에는 물리스의 크뤼 부르주아 쉬페리어 생산지인 샤토 그르시에 그랑 푸조를, 2005년에는 오메독의 5등급 크뤼 생산지인 샤토 드 카망삭을 매입하였는데 이 모두는 중국과 모로코 및 코르비에르의 경험이 반영된 것입니다.

이제 450 헥타르에 달하는 크뤼 클라세 또는 크뤼 아시밀레의 생산지가 메독의 메를로 소유 농지이며 여기에 해외의 테루아가 더 있습니다. 자크 메를로는 최고의 와인 생산 관련 종사자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계속해서 이 분야의 사정에 정통해 있었습니다. 그의 놀라운 아우라는 은퇴 후에도 계속되어서 고급 와인 시장에 변화가 있을 경우 계속해서 그의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랑드에 가서도 항상 전화를 곁에서 떨어트리지 않았으며 전화벨이 울리기 무섭게 받았습니다. 자크 메를로는 2008년 12월,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1세기의 변화

2000

21세기의 변화

21세기의 변화

2000년에 샤스 스플린 경영을 맡게 된 셀린 빌라르는 와인업계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보르도 포도원의 주연배우들의 손녀이자 딸이며 자매입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베르나데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기 전에 샤토 샤스 스플린을 경영했으며 샤토 샤스 스플린이 오늘날 높은 명성을 누릴 수 있도록 상당히 많은 부분을 기여했습니다. 셀린의 언니인 클레르가 엄마의 뒤를 이어 승계하면서 샤스 스플린의 국제적인 입지를 강화시켰습니다. 또한 와인 업계에서 유래없는 성공을 거둔 그녀의 할아버지, 자크 메를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겠지요! 그는 메독 지역에서 450 헥타르의 크뤼 클라세와 크뤼 아시밀레를 소유하고 와인 생산 및 유통을 담당하는 타이양 그룹의 설립자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 셀린은 와인과 건축학을 놓고 어느 것을 선택해야할지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그녀가 내린 답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열정을 충족시키려면 시간이 흘러가야 했기에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장 피에르 푸베와 결혼을 했고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장 피에르는 샤토를 최선봉에서 이끌며 그녀가 합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셀린이 대표직을, 그가 관리 감독을 맡게 된 것입니다.

장 피에르는 소통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가족그룹의 계열사 여러 곳과 기타 포도재배 관련 업계를 거치면서 실무를 익혔습니다.

셀린은 와인과 와인의 세계, 샤토 그리고 (언제나 풍경과 건축물이 있는) 공원을 사랑합니다. 셀린은 와인을 사랑하지만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와인과 함께 성장했기에 와인과 너무나 친숙합니다.

마지막 조각

2023

마지막 조각

마지막 조각

물리스(Moulis) 아펠라시옹에 속하는 네 개의 자갈 언덕 중 하나는 샤스 스플린(Chasse-Spleen)이란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되었습니다. 샤또 브리에뜨(Château Brillette) 와이너리 합병으로 샤스 스플린은 비로소 전체 조각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물리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서쪽의 석회암 위 얕은 점토질 토양과 결합된 네 개의 자갈 언덕이 이제 샤스 스플린으로 통합되어 해당 AOC의 모든 테루아가 완성되었습니다.
생산 면적 30 헥타르의 브리에뜨 와이너리는 굵은 자갈로 이루어진 많은 구획과 더불어 자잘한 자갈로 이루어진 균질한 토지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해당 일대에는 숲, 늪지대 및 초원이 풍부합니다.
에릭 부아스노(Eric Boissenot) 와인 컨설턴트는 “브리에뜨와 샤스 스플린 두 테루아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다”며 “두 와이너리의 결합으로 깊은 자갈에서 수확된 카베르네 소비뇽의 비율 덕분에 샤스 스플린은 더욱 메도크 와인의 특징을 자아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720
1820
1863
1912
1920
1976
2000
2023

1720

그르시에

그르시에

18세기 초, 왕은 보르도의 대자본가들에게 장교가 될 수 있고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과감한 성격의 그르시에는 1720년이 시작되자마자 포이약에 면한 도로에, 충적토 평야를 굽어보고 있는 자갈 산등성이를 선택하여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이 산등성이 정상에 위치한 마을은 그랑 푸조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습니다. 그는 이곳에 부속 건물을 여러 채 지었을 뿐만 아니라 20년 후에는 이곳에서 포도 재배를 하기 위하여 수도원 한 채를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유럽 북부 시장이 문을 연 다음부터 보르도의 경영자들은 품질이 좋은 와인을 생산하여 판매하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자 그는 곧바로 이를 실천에 옮깁니다. 그가 판매하는 와인은 평판을 높게 받았습니다.

1820

푸조 카스탱

샤스 스플린을 기다리다

조상의 이름과 마을 이름을 합쳐 쓰면서 공동 재산으로 등재되어있던 영지는 1820년 둘로 나뉘었습니다. 아들은 푸조 그르시에의 소유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딸인 뤼크레스는 포도 재배 샤토의 카스탱 드 푸조라는 남자와 결혼을 하면서 포도원을 상속받지만 이름을 물려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에 그녀가 생산하는 와인을 출품하게 되자 이름이 하나 필요했습니다. 푸조 카스탱은 그저 수많은 푸조 가운데 하나의 푸조에 불과했습니다.

그녀의 의붓딸로 이미 과부였던 로자 페리에르가 마침 그 때 전설로 내려오던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뭐냐하면, 바이론 경이 유럽 남부지방의 도로를 누비며 혁명을 지원하다가 그르시에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집안 증조부에게 성대한 환대를 받으며 와인을 마시게 된 바이론 경은 우울증(spleen)을 쫓는(chasser)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는 말로 이 와인을 극찬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가 바로 이 와인 이름이 ‘저작권’을 갖게 된 배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좀 생뚱맞지요.

1863

오딜롱 르동 & 로자 페리에르

샤스 스플린의 탄생

로자 페리에르는 강단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신교도였던 그녀는 물리정메독 마을에 이 교파의 학교를 세웠습니다. 남서부가 극단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절대적인 정교분리가 권장되던 시기에, 그녀가 한 이러한 행위는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학교는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마을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남편은 사망하면서 카스탱 그랑 푸조 도멘의 통솔권만을 그녀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이 영지는 이미 개간이 잘 되어 있던 곳으로, 명성은 더욱 더 높아지게 되는데 이는 런던 만국박람회 조직위원들이 이 영지에서 생산하는 와인의 빈티지 몇 개를 출품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사실 조직위원들은 영불해협을 건너서도 평판이 자자한 이 와인의 변하지않는 품질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와인은 거의 없으니까요…

로자는 마케팅 분야에서도 선구자였습니다. 초대의 대상이 된 그녀의 와인은 철수나 영희처럼 이웃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 와인의 이름에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농지들은 소유자의 이름과 장소 이름을 섞어쓰는 방식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랑 푸조 개간지들도 이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런던 만국박람회가 확인시켜 주었듯이 당시는 영어가 대세인 세상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영불동맹의 시대이며 에드워드 7세가 파리에서 여생을 보내는 세상이었습니다. 해수욕과 산행 등 멋스러운 것들은 영국에서 나왔습니다. 영어로 만들어진 단어들이 프랑스어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Spleen은 보들레르가 프랑스에서 ‘상표 등록’을 한 단어입니다.

오딜롱 르동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여전히 보르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껏해야 23세였었고 거장 상징주의 예술가들의 축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역에서는 이름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로자는 그가 십리 못되는 거리에 있는 부친의 농지인, 메독의 페이를르바드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그가 ‘악의 꽃’의 삽화를 그렸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친구들과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이었던 그녀의 살롱 한켠을 차지하고 있던 오딜롱의 시류 그림과 로자의 후각이 아마도 이 영지의 이름을 탄생시킨 근원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영감을 드러내는 그의 능력과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선택한 탁월한 이름, 샤스 스플린 말입니다.

1912

제그니츠 가문

단기간의 소유

18세기가 되자 보르도 고급 와인 시장은 북유럽에서 조사 대상이 되었습니다. 독일 장식을 단 한자동맹 상인들이 이 시장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대외구매를 보장받기 위하여 자식들을 지롱드 강가로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영업적 측면에서 시작된 보르도 항구와의 관계와 생활방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더 친밀해져갔습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포도나무 재배를 하거나 농지를 사기도 했습니다. 제그니츠 가문은 브레멘에서 사업을 키웠습니다. 이들은 몇 세대에 걸쳐 보르도 와인 사업을 했습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이들이 보르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더욱 강해지고, 그것이 1912년 페리에르 부인에게 샤토 샤스 스플린을 구매하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하지만 부인의 상속자들은 이 매각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집안이 몰락하는 순서를 보면 처음엔 여자, 말 또는 메독의 샤토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 농담처럼 나돌았습니다.
이들의 지휘 하에 샤스 스플린은 독일 북부에서 명성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하지만 아뿔싸! 2년 후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샤스 스플린은 적국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국가에 압수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뼛속까지 장사꾼이었던 이들은 브랜드에 대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잇점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국에서 이 와인을 재유통시키기 위해 재빠르게 새 소유주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샤스 스플린은 시장에서 선두 주자로서의 위치를 다시 차지합니다. 제그니츠 가문은 처음에는 라아리 가문과, 다음에는 메를로 가문과 실질적인 유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제그니츠 가문의 일원인 헤르만은 20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이 포도재배 농지의 탁월한 특별 전문가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는 이 농지를 돌보는 것을 좋아했고 루터교 신자답게 점잖은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1920

라아리 가문의 근대식 지휘

라아리 가문의 근대식 지휘

프랑스 모리악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랑드 출신 부르주아지 가문들이 수천 헥타르의 프랑스 해송을 소유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신랄하게 묘사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보르도의 땅을 처분하지 않은 채 스페인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라아리 가문은 바로 이 부류에 속했습니다. 랑드 식 사고방식이 확고했던 이들은 자신의 성(姓)까지도 지역의 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재산의 상당 부분을 삼림 수입에 의존하던 프로스퍼 라아리는 농업 쪽에서 이를 다양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독일인 소유 재산에 속하기 때문에 전쟁 배상금으로 국가 소유가 되었으나 좋은 평판을 유지하고 있던 물리스 포도재배 농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샤스 스플린은 2회에 걸쳐 경매를 진행했음에도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계대전이 막 끝난 후라서 당시의 경제 상황은 암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모든 재산은 바닥이 드러났기 때문에 포도재배와 같은 불확실한 모험을 하는 것은 위험한 짓으로 여겨졌습니다. 프로스퍼는 결국 결단을 내리고 1922년 이 농지의 주인이 됩니다. 해송과 테레벤틴유 사업이 잘 되고 있었기 때문에 포도 재배를 위한 개간 사업에 재원이 필요할 경우 버팀목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샤스 스플린은 천운의 수혜자가 되어 불안한 수입으로 인한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샤스 스플린의 와인은 변치 않는 품질 덕분에 유럽 시장에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와인의 라벨 그림은 샤스 스플린의 발효탱크였는데 1964년 메독에서 최초로 지하에 저장된 와인이라는 의미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주르날 오피시엘에 등재되지는 못했지만 1919년에 실시한 등급심사에서 탁월한(exceptionnel) 와인으로 평가받기도 했던 경력이 있는 샤스 스플린은 1970년대 초까지 이견이 없이 크뤼 부르주아 와인 가운데 최고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샤스 스플린은 이로부터 약 90여년이 지난 후 개최된 2003년 임시 등급 심사에서 다시 한 번 이 등급을 차지하여 품질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프로스퍼가 포도원의 주인이 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인 프랑크가 포도원 경영을 맡습니다. 오직 투자 대상으로 생각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아들은 열정적으로 포도원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50여년간 그는 놀라울 만큼 열심히 포도원을 가꾸었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샤스 스플린은 1855년 등급 심사 때 받았던 순위를 지속적으로 바꿔놓게 됩니다. 고향인 랑드로 돌아가 만년을 보낼 생각이었던 그는 변화하고 있던 와인 사업에 대한 준비가 잘 되어있는 메를로 가문에게 1977년 샤토를 매각했습니다. 그는 10년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1976

자크 메를로라아리 가문의 근대식 지휘

새로운 비전

자크 메를로는 1911년 보르도에서 태어났습니다. 행정관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그는 처음에는 같은 길을 걸었지만 사업을 하는 것에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1931년 HEC를 졸업하고 매형과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매형의 이름을 따서 사명을 지은 이 회사는 샴페인 판매를 통해 남아메리카에서 거둔 성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세트, 다음에는 베르시에 주소를 두고 유럽 남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출발하는 와인 수송선과 열차들을 프랑스에 문제없이 도착시켜 고객에게 와인을 전달하는 일을 담당하는 와인도매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큰물에서 놀 줄 아는 사람은 남보다 빨리 큰물을 예측, 분석하고 이에 대처합니다. 1970년 그는 프랑스 영토 내의 여러 지점을 정기적으로 점유하는 기업들의 점증하는 각종 요구를 대처하기 위한 일류 교섭 상대자로 빠르게 인정받았습니다. 회사가 성장한다는 것은 그가 담당하는 유명한 고객들이 증가함을 의미했습니다.

와인 시장이 고급화되자 자크는 보르도의 명품 와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몇 개의 보르도 와인 거래회사를 인수하였는데 1970년에는 메스트르자(Mestrezat), 1978년에는 지네스테(Ginestet)와 데스카(Descas)가 그 대상으로, 훗날 아들인 드니가 이를 물려받게 됩니다. 그는 론강 계곡의 콩파니 로다니엔과 루아르 강 계곡의 조제프 베르디에, 부르고뉴의 로피토(훗날 다시 매각)를 매입하는 등 프랑스 내의 다른 지역으로 사업을 넓혀갔습니다. 그는 파리 교외에 위치한 샹토방과 갈라서면서 다량의 와인 거래 사업에서 손을 털고 나옵니다. 와인 생산에 관심을 가진 그는 1976년(당시 나이가 이미 65세) 물리스의 최고급 크뤼 부르주아인 샤토 샤스 스플린을, 1978년에는 마고의 크뤼 부르주아인 샤토 라기르그를, 1982년에는 5등급 크뤼 클라세 드 포이약인 오바즈 리베랄을 매입합니다. 고급 와인 시장의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는 홀로 최선봉에 서서 매입한 세 개의 농지를 경영했을 뿐만 아니라 1992년에는 마고의 3등급 크뤼인 샤토 페리에르를 매입하여 이 대열에 합류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1996년 오메독의 크뤼 부르주아 생산지인 샤토 시트랑을, 1997년 생 쥘리앙의 2등급 크뤼 생산지인 샤토 그뤼오 라로즈를 그의 품안에 넣음으로써 더욱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가 고령에 이르자 자식인 드니, 앙트완, 장, 그리고 손녀딸인 클레르와 셀린이 그룹을 이끌어갑니다. 그룹은 2000년 오카나간 강 계곡에 오소요즈 라로즈라는 캐나다 합작투자 포도원을 설립하여 성장에 더욱 더 탄력을 받게 됩니다. 이 포도원이 위치한 곳은 보르도와 비슷한 지형이었기 때문에 북아메리카에서 대성공을 거두게됩니다. 2003년에는 물리스의 크뤼 부르주아 쉬페리어 생산지인 샤토 그르시에 그랑 푸조를, 2005년에는 오메독의 5등급 크뤼 생산지인 샤토 드 카망삭을 매입하였는데 이 모두는 중국과 모로코 및 코르비에르의 경험이 반영된 것입니다.

이제 450 헥타르에 달하는 크뤼 클라세 또는 크뤼 아시밀레의 생산지가 메독의 메를로 소유 농지이며 여기에 해외의 테루아가 더 있습니다. 자크 메를로는 최고의 와인 생산 관련 종사자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계속해서 이 분야의 사정에 정통해 있었습니다. 그의 놀라운 아우라는 은퇴 후에도 계속되어서 고급 와인 시장에 변화가 있을 경우 계속해서 그의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랑드에 가서도 항상 전화를 곁에서 떨어트리지 않았으며 전화벨이 울리기 무섭게 받았습니다. 자크 메를로는 2008년 12월,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0

셀린 빌라르

21세기의 변화

2000년에 샤스 스플린 경영을 맡게 된 셀린 빌라르는 와인업계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보르도 포도원의 주연배우들의 손녀이자 딸이며 자매입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베르나데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기 전에 샤토 샤스 스플린을 경영했으며 샤토 샤스 스플린이 오늘날 높은 명성을 누릴 수 있도록 상당히 많은 부분을 기여했습니다. 셀린의 언니인 클레르가 엄마의 뒤를 이어 승계하면서 샤스 스플린의 국제적인 입지를 강화시켰습니다. 또한 와인 업계에서 유래없는 성공을 거둔 그녀의 할아버지, 자크 메를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겠지요! 그는 메독 지역에서 450 헥타르의 크뤼 클라세와 크뤼 아시밀레를 소유하고 와인 생산 및 유통을 담당하는 타이양 그룹의 설립자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 셀린은 와인과 건축학을 놓고 어느 것을 선택해야할지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그녀가 내린 답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열정을 충족시키려면 시간이 흘러가야 했기에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장 피에르 푸베와 결혼을 했고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장 피에르는 샤토를 최선봉에서 이끌며 그녀가 합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셀린이 대표직을, 그가 관리 감독을 맡게 된 것입니다.

장 피에르는 소통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가족그룹의 계열사 여러 곳과 기타 포도재배 관련 업계를 거치면서 실무를 익혔습니다.

셀린은 와인과 와인의 세계, 샤토 그리고 (언제나 풍경과 건축물이 있는) 공원을 사랑합니다. 셀린은 와인을 사랑하지만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와인과 함께 성장했기에 와인과 너무나 친숙합니다.

2023

마지막 조각

마지막 조각

물리스(Moulis) 아펠라시옹에 속하는 네 개의 자갈 언덕 중 하나는 샤스 스플린(Chasse-Spleen)이란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되었습니다. 샤또 브리에뜨(Château Brillette) 와이너리 합병으로 샤스 스플린은 비로소 전체 조각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물리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서쪽의 석회암 위 얕은 점토질 토양과 결합된 네 개의 자갈 언덕이 이제 샤스 스플린으로 통합되어 해당 AOC의 모든 테루아가 완성되었습니다.
생산 면적 30 헥타르의 브리에뜨 와이너리는 굵은 자갈로 이루어진 많은 구획과 더불어 자잘한 자갈로 이루어진 균질한 토지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해당 일대에는 숲, 늪지대 및 초원이 풍부합니다.
에릭 부아스노(Eric Boissenot) 와인 컨설턴트는 “브리에뜨와 샤스 스플린 두 테루아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다”며 “두 와이너리의 결합으로 깊은 자갈에서 수확된 카베르네 소비뇽의 비율 덕분에 샤스 스플린은 더욱 메도크 와인의 특징을 자아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